LongWay8 - Xaysomboune-3
Robbie Williams - Supreme
"어리버리도 올라가봐~"
"당근이지~"
우리는 오랜 시간 그렇게 소통을 이어간다. 장정은 자기만족만이 아닌, 쌍방향의 소통이어야 함을 어리버리도 이젠 잘 안다.
We were arrested in Xaysomboune-city by Laos Police. After arrested, we were taken to the police station for interrogation. Because this Xaysomboune is a restricted area still now.
하지만....Xaysomboune(싸이쏨분)에 진입하자마자, 30여 분만에 우린 경찰서로 체포(?), 연행된다. 머...라오 경찰에게 체포되어 연행된 것이 첨이 아니다.
The police captured our passport & papers, and He asked me about this and that for interrogating. 10min...20min...30min...
씸풀하게 말하자. 인도차이나에서의 전재이 종결된지 30여 년이 흘렀건만, 라오에서의 SECRTE WAR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Xaysomboune은 아직까지 이방인의 여행 제한구역이다. 싸이쏨분의 북쪽 일부 도로가 폐쇄되었다는 상황까지는 알았지만, 싸이쏨분 지역 전체가 제한구역임은 알지 못했다.
(우린 이방인이 거의 진입하기 힘든 동쪽 난코스 루트로부터들어왔기에, 검문을 피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싸이쏨분엔 아직 CIA가 지원했던 反정부 무장 몽족 게릴라가 ㅟ협세력으로 엄연히 암약하고 있다는 라오 정부의 판단과 봉쇄가 2010까지 유효하다는 것)
(싸이쏨분에선 등록되지 않은 라오 심카드는 통화할 수 없는 듯 하다.)
우릴 정밀(?) 취조 및 기록하고 상부에 보고한 경찰은 요구한다.
"1인당 50,000K씩 벌금 내세요 "
벌 금은 무신...기냥 삥이지.. 버텨야 한다. 10분...20분...30분.... 도대체 <'남짜이'>를 보여달라는 나의 선처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상황은 험악해지기 시작한다. 잘못하다간 유치장에서 하루를 보내어야 할런지 모른다.
G.I.V.E.U.P.
눈물을 머금고 1인당 50,000K씩 삥뜯김에 동의한다. 이 도시의 경찰들에겐, 가뭄에 콩나듯 우리와 같이 간신히 진입해 들어오는 이방인들이 포기할 수 없는 <봉>인 것이다.
인도차이나 현대 戰史에 관심있는 이들이 아니라면 생소할 수 밖에 없을 Vang Pao 前 장군에 대한 기사가 2007년 어느 날 뜬다. 고령의 兵(노병) 방파오는 CIA 첩보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쿠데타 배후의 주역 타이틀을 꿰어차고, 이역만리에서 21세기 다시 한 번 인도차이나 Secret War의 최일선으로 컴백한다. 戰史에도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라오의 비밀 전쟁(Secret War)은 그렇게 아직 엔딩의 마침표도 제대로 찍지 못한채 슬픈 히스토리를 질기게 이어가고 있다.
70년대 인도차이나 전쟁서 미국 편든 방 파오 장군, 미사일 등 무기 반입 라오스 정부 건물 공격 기도
미국 검찰이 라오스 정부를 무력으로 전복하려는 기도를 적발했다. 주범은 미국의 2차 인도차이나전쟁을 도운 ‘어제의 동지’ 방 파오(76) 장군이다.
Hmong general Vang Pao, who was arrested last week for allegedly plotting to overthrow the government of Laos, speaking in 2000 after laying a wreath at the Vietnam Memorial in Washington. (AFP Photo)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 연방검찰은 라오스 사회주의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라오스군 소장 출신인 방 장군 등 9명을 구속했다고 <에이피>(AP) 통신이 5일 보도했다. 라오스 출신 망명자 8명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주방위군 중령 출신인 해리슨 울리히 잭이 피의자 명단에 포함됐다.
라오스 공산화에 따라 미국으로 망명한 몽족 사회 지도자인 방 등은 1천만달러(약 92억원)를 들여 지대공미사일과 대전차미사일 등을 구입해 이달 12일과 19일 타이를 통해 라오스로 밀반입하려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이들이 사들인 소총 사진을 증거로 제출했다. 방이 이끄는 ‘라오해방운동’은 미 해군 특수부대인 네이비실 출신 등으로 용병부대를 조직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드러났다. 공격 목표인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의 정부 건물과 군시설에 대한 정탐활동도 벌였다.
연방검찰은 “몇천명을 한꺼번에 사살하려는 음모가 진행됐다”며 “영화 대본 같은 얘기로 들리겠지만 사실”이라고 밝혔다. 이번 사건은 미국의 인도차이나 공산주의세력 분쇄에 협조했던 이들이 그때와 같은 일을 꾸미다 이제는 종신형까지 선고받을 수 있는 범죄 혐의로 체포됐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로 불릴 만하다.
방은 1960~70년대 미국이 북베트남과 벌인 2차 인도차이나전쟁에서 중앙정보국(CIA)과 협력해 싸운 인물이다. 그는 미국이 라오스 동부에서 북베트남의 병참선(호찌민 루트)을 차단하고 라오스 공산세력을 뿌리뽑으려고 벌인 ‘비밀전쟁’에 중앙정보국이 훈련시킨 몽족 병사 몇천명을 이끌고 활약했다. 그러나 1975년 베트남에 이어 라오스도 공산화되자 미국으로 도피했다. 미국은 ‘비밀전쟁’에서 폭격기를 50만회 출격시켜 라오스 인구 1명당 0.5t의 폭탄을 쏟아부었지만, 이런 사실은 당시 외부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다.
몽족 망명자들과 함께 체포된 잭은 1968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베트남에서 비밀작전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이번 모의에서 무기 구입과 병력 조직을 담당했다고 미국 언론들은 전했다.
미국은 공산화 주역인 라오인민혁명당이 통치를 계속하는 라오스와 1992년 외교관계를 정상화했다.
출처 : 한겨레 이본영 기자 기사등록 : 2007-06-05
美검찰, 라오스 쿠데타 기도혐의 몽족 지도부 체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1656789
인도차이나, 중남미, 티벳, 중동 등 세계 도처에선 그렇게 美정부와 CIA에 의해 조종되는 추악한(?) 비밀 전쟁이 은밀하게 쓰여져 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혹자는 '파테트 라오'가 총 한방 제대로 쏘지 않고서 무혈 진군으로 라오를 장악하였다는 소설같은(?) <역사>를 구전하며 라오인의 순박함(?)과 낭만적(?) 혁명사를 읆조린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 라오스는 제국의 20년에 걸친 잔혹한 공습과 대량 살상의 상처를 고스란히 떠 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제국과 민족은, 좌와 우는, 왕당파와 反왕당파는 비밀전쟁의 최일선에서 몇 십년을 충돌하며 피의 <역사>를 적어간다.
그렇게 크메르 루즈의 '킬링필드' 이전,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에선 최첨단 대량 살상 무기로 중무장한 미군에 의해 집행된 또 다른 '킬링필드'의 잔혹사가 엄연하게 존재하였음에도 그 누구도 제대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렇게 역사는 勝者(승자)의 勝利觀的(승리관적) 기록과 질서일 뿐이다. 코뮤니스트, 무슬림, 反美波(반미파) 등을 유일한 <惡>으로 규정한 잘 각색되어어진 <필승 아메리카>의 편집 드라마는 끝없이 리바이벌되고 있다.
활자화된 공교육적 TEXT만이, 추호도 의심해서는 곤란할 <진실> 100%라며 굳세게 일방향적 독해만을 반복하는 이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역사>의 또 다른 모습도 필연이라는 인과의 또 다른 데이타와 파편으로 존재함도 분명한 현실이다.
라오스 독립후 1975년까지 3차의 좌·우파와 왕당파의 연립정부가 구성되었으나 항상 우파와 왕당파의 세력이 우세하였다. 그동안 두 차례의 쿠테타와 우파군과 파테트군 사이의 대치상황이 전개되었으나 대규모의 유혈 사태를 빚지 않고 지난 것을 보면 경이롭다 하겠다.
이는 파테트 라오가 게릴라 부대를 기축으로한 무장세력이기는 했으나 디엔 비엔 푸 전투후 개최된 제네바협정 체결 협상테이블에 초대되었고 협정 17조에 의해 파테트 라오가 북부 2개주(퐁살리주와 후아판주)에 대한 통치권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파테트 라오를 비엔티안 우파 정부군과 통합하고 우파 및 왕당파와 연합정부를 구성키로한 정치협상에 따라 1959년에 파테트 라오측에서 3명의 각료가 연립정부에 참여했을때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자. 연립정부내의 갈등으로 우파는 파테트 라오측의 수파누봉 대통령과 누학 폼사반(전 대통령)등 각료 3명을 포함한 수뇌 16명을 수감한 적이 있는데 이들이 어느날 감쪽같이 탈출한 것이 발견되었다. 탈출 경위와 상황을 조사하려 해도 이들 정치범을 감시하던 간수가 모두 이들과 함께 탈출했기 때문에 조사도 체포도하지 못했는데 이들 16명의 간부들은 4개월후 비엔티안에서 동북으로 500km 떨어진 퐁살리의 근거지로 귀환했음이 밝혀졌다. 이들은 정부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산악을 도보로 이동했다는 바 이때 산악거주 소수민족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파테트 라오의 게릴라 활동은 월남전의 확대에 따라 1963년에서 1973년까지의 10년간 최고조에 달하는데 이때 라오스 땅에 활동한 월맹군은 최고 4만명에 달하였다 하며 파테트 라오군은 2개 사단으로 몇 천명에 불과했다 한다. 이 기간중 우파인 정부군을 지원한 것이 미국인데 미국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라오스를 중립국으로 인정해야 했기 때문에 월남에서와 같이 정부군은 투입하지 못하고 타일랜드 동북부 우봉과 우돈의 기지에서 발진한 폭격기가 월맹과 베트콩을 폭격한다는 것을 구실삼아 1964년에서 1973년까지 10년간 8분마다 1회씩 총58만회나 출격하였다 한다.
이기간 미국은 파테트 라오 겔릴라가 활동지역으로 삼고 있는 라오스 북부와 남부 산악지역 호치민 루트에 총 200만톤의 폭탄을 투하했다고 하는데 공식적으로는 이를 부인해오다가 1969년에 비로소 폭격사실을 시인하기 시작했다하며 이때 파테트 라오와의 전쟁을 통상 은밀한 전쟁(secret war)으로 부른다. 이때 격추된 미군 파이롯트들은 60-70여명에 달한다 하며 전시중 미국은 이를 부인하다가 1990년에 들어와 미공군의 참전을 인정하고 라오스측과 1996.3.21 미폭발 포탄(UXO)제거 협정에 서명하고 포탄제거작업과 병행하여 전사한 미공군의 유해송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은밀한 전쟁기간중 미국은 비엔티안 주재 미 대사관 산하에 USAID를 두고 있었는데 우파 라오스 정부에 대해 재정원조와 함께 주로 소비재를 지원해 줌으로써 비엔티안은 한때 미국 달러로 호황을 누렸다 한다. 파테트 라오에 대한 폭격외에 미 CIA는 부패한 우파 정부군을 직접 지원하기 보다는 산악거주 소수민족인 몽족을 대파테트 라오 소탕전에 동원하였다. 그러나 월맹군과 동맹하고 있는 파테트 라오 세력의 남진을 막지 못하고 1973년경에 비엔티안 북쪽 100km까지 파테트 라오군이 진출하는데 성공하고 CIA의 지원을 받은 몽족은 방파오(Vang Pao)의 철수지휘에 따라 200여 마을로부터 약 7만명의 몽족을 비엔티얀 부근으로 소개하였다가 파테트 라오의 비엔티얀 입성후 방파오는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75년 8월 파테트 라오군의 비엔티안 무혈입성으로 약 25만에 달하는 몽족이 일단 메콩강을 건너 타이란드로 이동한후 대부분 미국으로 이주 정착하였다.
독자제위는 사이공 함락과 더불어 생겨난 월남의 보트피플 이야기는 익히들어 잘알고 있을 것이다. 사이공 함락후 4개월만에 닥친 비엔티안 함락시 당시 라오스는 전인구(약 380만으로 추정)의 10분의 1에 달하는 35만명이 메콩을 넘어 타일랜드로 탈출후 미국, 프랑스, 호주 등지에 정착하였다. 이중 태반인 25만이 CIA에 협조한 몽족이고 나머지 10만명이 우파, 왕당파 정부의 수뇌, 정부군 간부와 그 가족 그리고 대학교수, 의사, 언론인 등 소위 테크노크라트라 할 지식계급이었다 한다.
라오스 공산화때 해외로 도피한 피난민 숫자는 자료마다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최소30만에서 최대45만까지로 잡는다. 현 라오스 정부는 이들 피난민 숫자를 공식 발표한바 없다. 유엔난민 고등판무관(UNHCR)에 따르면 1975년에서 1986년 사이 국외로 탈출한 난민총수가 413,6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따라서 1975년 공산화시 약35만 그후 약10년에 걸쳐 추가로 6-7만이 해외로 이주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출처 : 주 라오스 대사 정 화 태
라오스 역사 :
http://encyber.com/search_w/ctdetail.php?masterno=714384&contentno=714384
‘
비밀전쟁’은 1964년 5월25일부터 대라오스 공습으로 발전해나갔다.그로부터
미국은 1973년까지 9년간 대라오스 ‘비밀전쟁’에 무려 200만t에 이르는 각종 폭탄 700만개를 기껏 인구 400만명 남짓한 라오스에 투하했다. 미국의 대라오스 폭격은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였지만 모든 것을 비밀리에 진행한 탓에 심지어 미군 고위 당국자들마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다.미군은 그 ‘비밀전쟁’을 통해
라오스 국민 한 사람의 머리 위에 0.5t에 이르는 폭탄 1.75개씩을 뒤집어씌운 셈이다. 지금까지 전사에 최대 규모 융단폭격으로 기록된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사용한 폭탄과 포탄을 모두 합친 게 49만5천t이었으니, 대라오스 공습에 사용한 200만t이라는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을 듯하다.그 비밀전쟁을 위해 미군은 9년 동안 평균 7분30초마다 전폭기를 띄워 무려 58만344회나 출격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 결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달 분화구를 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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